[20240428-005] 시선으로부터 - 정세랑

여전히 깨닫지 못한게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날은 바람 한 줄기만 불어도 태어나길 잘했다 싶고, 어떤 날은 묵은 괴로움 때문에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싶습니다. 그러나 인간만이 그런 고민을 하겠지요.  p.280 시선으로부터-정세랑

내가 지켜본 바로는 질리지 않는 것이 가장 대단한 재능인 것 같았다. 매일 똑같은 일을 하면서 질리지 않는 것. 수십 년 한 분야에 몸을 담으면서 흥미를 잃지 않는 것. 가은 주제에 수백수천 번씩 비슷한 듯 다른 각도로 접근하는 것. 아득할 정도의 반복이었다. 예외는 있지만 주제도 한둘 이었다. 각자에게 주어진 질문 하나에 온 평생으로 대답하는 것은 질리기 쉬운 일이 아닌가? 그런데도 대가들일수록 질려하지 않았다. 즐거워했다는 게 아니다. 즐거워하면서 일하는 사람은 드물다. 질리지 않았다는 것이 정확하다. —p.289 시선으로부터- 정세랑





7개월 전 살면서 처음으로 이별을 겪었다. 6년이라는 긴 기간동안 사랑했던 사람을 떠나보내는 데는 생각보다 많은 품을 필요로 했다. “품”은 사전의 정의에서는 “어떤 일에 드는 힘이나 수고” 를 뜻하는 말이라고 한다. 동음이의어로 “두 팔을 벌려서 안을 때의 가슴”이라는 말이 있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두 팔을 벌려서 내 가슴 속의 한 켠을 내어주기 때문에 힘이 들고 수고로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는 10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를 떠나보내는 한 가족의 모습을 그려낸다. 연인이던 가족이던 사랑했던 사람을 떠나보내는 데는 오랜 시간과 많은 품을 들여야하는 것이 분명하다. 이 책은 나에게 이별을 소소한 일상의 아름다움으로 승화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나는 전남자친구를 사랑했던 만큼 아직도 제대로 이별하지 못했던 것 같다. 새로운 여자친구가 생긴 것 같았는데, 그 사실을 깨닫고 난 뒤에 등줄기에 식은땀이 날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나를 사랑한다고 속삭였던 사람이 이제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속삭일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시간이 지나더라도, 헤어지더라도 변하지 않을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쉽게 다른 사람을 만나 소셜미디어에 티를 낸다는 것(나와 사귀면서는 단 한번도 소셜미디어에 티를 낸 적이 없다)은 그 사람이 오랜 기간 동안 속삭였던 “사랑”이 거짓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나와 한 종류의 이모티콘을 정해놓고 맞춰 쓰면서 사랑한다고 이야기했었다. 나와 쓰지 않던 새로운 이모티콘으로 사랑을 이야기할 모습이 상상되면서 상대 여자가 받을 “사랑”이 겉껍데기만 바꾼 그 사람의 거짓말일 것 같아서, 그동안 그 거짓 사랑을 믿었던 내 모습이 바보같아서 내리 이틀을 잠만 잔 것 같다. 밥 맛도 없고 무기력했다.

그의 사랑해가 거짓이었음을 한 3년 전부터는 인지하고 있었다. 변한 눈빛과 더 이상 나와 함께하는 미래를 그리지 않는 그의 사랑은 내가 원하는 형태의 사랑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미 남자친구와 여자친구 라는 관계에서 안정성을 느껴버린 내가 그 관계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내가 그 사랑이 거짓임을 알고서도 바보처럼 3년 동안 그 관계를 이어나갔던 것이다. 이미 지나간 시간에 고통받을 필요는 없고, 고통받고 있다면 벗어날 때가 되었다. 온고지신의 자세로 교훈만 얻고 새로운 삶의 형태를 받아들여야한다. 나에게 새로운 사랑이 찾아온다면 거짓말을 알아볼 줄 알아야 할 것이다. 귀신같이 느껴지는 거짓 사랑의 세레나데를 알아보고 그런 사람에게는 나의 사랑을 줄 가치가 없다는 것을 인지해야 할 것이다.

6년이라는 긴 기간동안 내 품 가장 큰 한 켠을 내어주었던 사람인 만큼 그 사람을 떠나보내는데 많은 품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빈 자리가 느껴지며 외로움이 느껴지는 것도 당연하다. 그 빈 자리를 나 스스로에게 내어주는 과정이 필요하다. 내가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내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를 고민해야할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만 하고 내가 싫은 것은 거절해야 할 것이다. 갈등을 회피하기 위해 내 욕구를 묵인하는 것은 다시는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다. 앞으로 내 품안에는 나를 가득 담아야 할 것이다. 이 책에서 보았던 문구처럼 여전히 깨닫지 못한 것이 너무 많다. 아직도 젊은 나에게 나 자신에 대해서 고민할 수 있게 해주고, 나를 품을 수 있는 자리를 내어준 나의 옛 사랑에게 고마움을 표한다.

“어느 날은 바람 한줄기만 불어도 태어나길 잘했다 싶고, 어떤 날은 묵은 괴로움 때문에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싶습니다. 그러나 인간만이 그런 고민을 하겠지요.“ 어느 날은 괴로운 일도 있고 어느 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즐거운 날도 있다. 고통도 삶의 일부이고 고통이 있어야 행복함을 느낄 수도 있다. 괴로운 일이 있더라도 그것이 인간이기에, 내가 살아있기에 주어지는 고난이라고 생각하고 나에게 집중해야겠다. 내가 하고싶었던 것을 가족에게도 얽매이지 않고, 내가 하고싶었던 것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 이 시간을 온전히 나에게 집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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